왕추크 부탄 국왕은 “나의 땅을 내어줄 테니 한국에서 배워온 대로 스튜디오를 반드시 세우라”며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벤치마킹을 강력히 주문했다. 이에 지난해 4월 부탄 정부와 영화 관계자들이 한국 영화계 실무진에게 물밑 접촉을 시작했다.

부탄 입헌군주제 첫 번째 지도자인 왕추크 국왕이 한국 영화산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뭘까. 부탄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한 인도의 인접국이다. 그만큼 발리우드 영화에 자국 문화 영토가 잠식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진섭 코익스 대표는 “부탄의 젊은 지도자로서 제 나라 전통이 사라지는 형국에 개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며 “2주간 둘러본 부탄 영화산업 현실은 한눈에 보아도 몹시 척박했다. 한 해 20~25편의 영화를 제작 중이나 그 면면은 한국의 1960~1970년대 수준에도 미달하더라”고 말했다.

부탄 이외에 한국 영화 시스템을 가장 활발히 이식 중인 곳은 동남아시아다. 그중에서도 공식 통계상 9500만여 명의 인구를 보유한 베트남이 주된 거점지로 꼽힌다. 베트남 영화산업 발전에 가장 기여하는 주체는 단연 한국 기업이다. 롯데시네마와 CGV가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극장 운영과 함께 영화 제작·투자·배급을 하고 있다. 2008년 진출한 롯데시네마는 41개 지역에 183개 스크린을, 2011년 진출한 CGV는 71개 지역에 418개 스크린을 구비하고 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극장을 늘리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 영화산업도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는 통계가 입증해준다. 2015년 베트남 영화 관객은 공식 인구 3분의 1 미만인 2900만명이었다. 영화관도 61개(스크린 352개)에 불과했으며, 국민 1명당 한 해 영화 관람 횟수는 1회를 한참 밑돌았다. 한 해 평균 4편을 보는 한국 영화 시장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이 진출하면서 2016년 3500만명, 2017년 4200만명, 2018년 4300만명으로 성장해 인구의 2분의 1 수준으로 늘었다. 지난해 기준 베트남 영화 극장 수 역시 135곳(스크린 744개)으로 4년 새 2배 이상 컸다.

이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과도 부합한다. 극장이 많아지니 극장에 가는 관객도 많아지는 것이다. 최근 베트남 호찌민에서 만난 ?쭝 영화 감독은 “한국 기업이 주도해 극장 수가 늘수록 관객 수도 비례해 는다”며 “향후 관객 1명당 한 해 1편씩만 보게 되더라도 1억명 시장으로 크는 셈이니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 로맨스 코미디물 `쿠아 라이 보 바우`로 270만 관객을 모은 이 나라 최대 흥행 감독이다. 시장 규모가 한국보다 5배 작은 나라이기에, 한국 관객으로 치면 1300만여 명이 그의 영화를 본 셈이다. 그는 “한국 영화를 매우 사랑하며 훌륭한 시나리오와 전문적인 배우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지 영화인들을 만나 보니 베트남 영화계는 한국 기업을 통해 이 나라 영화 편수를 늘리는 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자국 영화가 많아져야 시장과 산업도 함께 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현지 평판이 좋은 기업은 롯데시네마였다. 한국 영화 리메이크에 이어 로컬 영화 제작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롯네시네마는 지난해 말 개봉해 연초까지 100만여 명을 모은 가족극 `대디 이슈`, 지난 2월 개봉한 액션물 `하이?`에 이어 8월 `버터플라이 하우스`라는 코믹물까지 잇달아 선보인다. 세 편 모두 현지 감독이 찍고 현지 배우가 출연한 로컬 영화다. `버터플라이 하우스` 감독 마틴 씨는 “베트남 영화 시장은 `스크린쿼터제`가 없고 정부 지원 또한 열악하다”며 “외국 기업을 통해서라도 자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길 바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로컬 영화 `하이?`은 그런 점에서 적절한 예다. 롯데시네마가 투자·배급하고 현지 제작사가 만든 이 작품은 누적 관객 240만명을 모아 역대 베트남 박스오피스 3위에 올랐다. 리엄 니슨 주연의 할리우드 액션물 `테이큰`과 같은 설정으로 범죄 조직에 납치된 딸을 구하려는 싱글맘의 추적기를 그린다. 액션 장르가 이 나라에서 크게 흥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베트남 흥행 영화 `마이가 결정할게 1·2` 감독이자 `대디 이슈` PD인 찰리 씨도 이 점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베트남 영화 최초로 공상과학(SF)과 스릴러, 액션이 결합된 영화를 준비 중이어서다. 호찌민 한 호텔서 만난 그는 “`하이?` 흥행이 이 나라 장르 저변 확대를 보여주는 신호탄이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베트남 시장 키우기에 진력하는 이유는 젊은 관객에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대 이하다. 이들이 극장 문화에 익숙해질수록 자녀 세대도 자연히 극장을 찾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이수민 롯데시네마 베트남법인장은 “현재 베트남은 1990년대 초 한국 영화계를 빼닮았다. 그만큼 전망이 밝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출처: ⓒ 매일경제 & mk.co.kr,  김시균 기자]